작품에 여념 없는 최 병훈 명장. |
그는 요즈음도 매일 3평 남짓한 가게에서 도장 파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작업실이자 삶의 터전인 삼양사(02-903-5240)에는 인장이 보편화되기 이전에 손으로 직접 쓰던 수결(手決)과 함(啣)을 비롯한 다양한 ‘작품’들이 눈길을 끈다.
전각으로 표현한 ‘십장생전각도’, ‘사군자도 전각’, 書와 畵를 접목해 해남석에 전각한 ‘효제도 전각’, 본관 · 성씨 · 세손 · 이름 · 호를 하나의 인장에 새긴 김홍도의 세손인, 독립선언문, 천자문, 반야심경을 쓴 서예병풍, 도자기에 쓴 서예작품, 각종인장을 용도별 · 시대별로 전시해 놓았다. 그의 폭넓은 안목을 잘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여섯 살 때부터 서당을 다녔다는 최 명장은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14세 때인 1964년 상경해 서예학원의 사환으로 일하면서 틈틈이 한문과 서예를 익혔다.
그가 인장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68년 동양문화사라는 인쇄소에 견습공으로 취직하여 인쇄와 도장 파는 일을 도우면서부터이다.
끊임없는 탐구로 일구어 온 36년
고무도장과 목도장은 선배들의 어깨너머로 틈틈이 배웠지만, 고급도장은 가르쳐 주지 않자 76년 전국인장업연합회에서 실시한 기술교육과정을 수료하고, 77년 아예 자신의 이름으로 개업했다. 현실에 만족하기보다 제대로 된 인장을 새기기 위해 자신만의 공간을 구축해 나가기 시작했다.
인장은 미리 만들어 놓고 파는 게 아니라, 주문을 받으면 인장(印匠 : 도장장이)이 손수 새겨 곧바로 상품이 되므로 전수를 한다는 게 어렵다. 따라서 도제(徒弟)도 필요 없고, 스스로 배울 수밖에 없다. 최 명장 역시 같은 길을 걸었다. 한마디로 끝임 없는 연습과 습작과정을 밟아야했다.
“수도 없이 바로도 파보고 거꾸로도 파봤습니다.”
바른 상을 찍어내기 위해 뒤집혀진 상을 새겨야 하는 인장의 특성상 손에 굳은살이 박이도록 수도 없이 새겨보았다는 최 명장.
자신만의 독특한 글씨체를 연구하여 언젠가는 ‘장인’으로 인정받겠다는 굳은 각오로 버텨 왔다고. 5여 년 동안 120여개의 업소를 돌아보며 여러 사람들의 독특한 서체와 기술을 익혀나가기도 했다. 그런 과정에서 자격증도 기능사보에서부터 기능사 1급까지 단계별로 따내는 기록도 세웠다.
여러가지 인장문양. |
최 명장은 인장기능인으로 안주하기보다는 자신의 작업에 예술성을 부여하기 위해 전각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낮에는 생계를 위한 작업에 매달리지만, 밤이면 전문서적과 인영본을 교재삼아 새로운 영역을 넓혀 나가는데 힘을 쏟았다.
전각에 심취하면서 자신의 인장기술에 예술 혼을 불어넣어 인장과 전각기법을 접목한 작품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그 결과 한국예술대제전 입상을 비롯해 각종 미술대전과 전람회에서 수상함으로서 실력을 인정받기에 이른다.
그는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았다. 인장공예를 생활속에서 감상할 수 있도록 작품으로 승화시키는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우선 작은 병풍을 만들어 보았다.
수작업만을 고집하는 그였지만 작은 병풍에 글씨를 새겨 넣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병풍 작업에만 레이저 조각기로 작업을 했다. 자신이 직접 붓으로 쓴 병풍을 컴퓨터로 옮겨 조각기로 파내는 공정이다. 그가 개발한 장식용 미니 조각병풍 및 제조방법은 특허를 획득했고, 그밖에 몇 가지도 특허출원 중에 있다.
“그동안 시행착오도 많았습니다. 만들어 놓고 보니까 국내에서도 그렇지만 특히 외국인이나 해외 동포들에게 훌륭한 선물로 손꼽히고 있어 좋습니다.”
최 명장의 특허 작품인 미니병풍뿐 아니라 다양한 탁상용 소품에서부터, 유명인사의 친필휘호를 새긴 작품, 문화재 서예작품을 소형으로 복제 · 재현할 수 있는 등 그 활용범위가 무궁무진하다.
인장의 측관 방법 및 인도(印刀)를 개발하여 발명특허를 출원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나무의 결 때문에 글자를 새기기 어려웠던 측면에 인장을 새긴 날자와 조각한 사람의 아호를 새길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거기에 적합한 조각도 기법을 개발하기에 이르렀다.
최 명장은 향나무원목 인장함을 개발하여 의장 출원하여, 인장의 고급화 ·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데도 한몫을 했다.
미니병풍. |
아이들과 상 타기 경쟁…떳떳한 직업 일깨워
최 명장이 신지식인으로 선정된 동기는 자녀들에게서 비롯되었다. 자신이 배움에 대한 꿈을 이루지 못한 아쉬움 때문에 그는 큰아들을 사립학교에 넣었다. 최고의 교육을 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환경조사서에 자신의 직업을 무어라 적을지 막막했다. 아이의 기를 살리기 위해서도 ‘인쇄업’이라고 쓰지 ‘도장업’이라고 썼다고 아내와 밤새 다투기도 했다. 그때 처음으로 인장업을 그만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천직으로 알고 해온 일, 어차피 할 것이면 최고가 되어야겠다는 각오를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인장공예 범주에 전각이 포함되어있는데 전각의 표현 방법이 다양하고 용이했다. 어려서부터 닦아온 서예와 인장에서 터득한 다양한 기법이 어우러져 어렵지 않게 전각의 세계에 몰입할 수 있었다.
왕의 어보와 상장. |
그런 아이들에게 뭔가 보여주고 싶어 생각 끝에 상 타기 경쟁을 벌이기로 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아이들과 함께 공부했다. 서로를 추스르면서 공부를 하자 시너지효과가 엄청났다.
아이들도 열심히 했지만, 최씨도 만만찮은 경력을 쌓게 되었다. 현대미술대상전에서 금상과 일본동화미술대상전 최우수상을 비롯해 11번의 수상에 이어 표창 12회, 감사패 18회를 받기에 이르렀다.
최 명장은 직접 연구 · 개발한 자료를 스크랩하고 작품을 복사해 자료집을 만들었다. 각종 전각대회를 휩쓸며 수상한 상장과 임명장을 모으니 책 한권이 될 정도란다. 이런 업적으로 지난 1999년 신지식인으로 선정되었다. 비로소 아이들에게 아버지 노릇을 한 것 같았다고 웃는다.
최 명장은 오로지 ‘도장장이’를 천직으로 알고 전통인장 발굴과 재현을 위해 36년간 외길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인장은 글자나 문양을 새겨서 찍어 사용하는 신물(神物)의 총칭이다. 인(印)이란 조(爪: 손톱 조)자와 절(卩:節 병부절의 약자)이 합쳐, ‘손으로 찍어 질병과 액운을 없앤다’는 뜻이다. 단체는 단체대로, 개인은 자기를 대신해서 모든 것을 확신하는 증표로 인장을 찍는다. 모든 것의 완성이자 책임을 지겠다는 뜻으로 끝부분에 찍어 확신, 믿음을 주는 신표(信標)다.
황제가 쓰는 새인(璽印), 황후의 보인(寶印), 고급관리의 장인(章印), 백성의 인(印)과 문인의 도서인(圖書印) 등 인장은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명칭을 달리 했으나 요즘에 와서는 도서의 도(圖)자와 고급관리의 장(章)을 따서 ‘도장’ 또는 백성의 인(印)자와 관리의 장(章)자를 따서 ‘인장’이라 부른다.
고도형 새인과 문양. |
“인장이란 곧 개인의 믿음의 증표, 곧 신표(信標)입니다. 때문에 작은 물건이지만 소홀히 만들 수는 없지요.”
‘작은 한 치에 우주를 끌어 들인다’는 말대로 작은 도장 표면에 그 사람의 인생이 실려 있고, 글자 한 획이나 작디작은 점에까지 예술성과 상징성이 내포되어 있기 마련이라고 강조한다. 그런 인장을 찍어서 국가나 관청을 대표하고 개인을 나타내는 증표로 사용하는 것이란다.
“혼과 열정없으면 좋은 작품 기대 어려워”
초기의 인장은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예술의 한 분야로 발달하기 시작하여 신물(神物)로서 종교적 기능을 갖기도 했다. 봉인으로서의 역할, 왕가의 표식이 되기도 했으며, 오늘날에는 가장 중요한 신표로서의 기능을 갖게 되었다. 인장은 사용처나 용도, 재질, 인면(印面)의 문자나 문양도 서체에 따라 무수히 변화되어왔다.
(위)수결.(아래)관인과 사인. |
전각에 있어서 인장은 ‘동양문화의 꽃’으로 일컫는다. 그래서 ‘사방 한 치의 예술’로 표현되어왔다. 인장에 표현된 선과 획, 공간과 여백의 예술적 조화가 어우러진 멋은 독특한 문자예술로서의 세계와 가치를 내포하고 있다.
최 명장은 이를 통해 사군자, 십장생도, 효제도 같은 회화 미술을 전통기법과 전통문양을 결합, 전각작품으로 재현하여 사라져가는 우리의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데에도 한 몫을 하고 있다.
그는 그동안 고도형(古圖形) 새인이나 고새인, 옥새로 불리 우는 국새, 수결과 함, 세손인, 관인(官印)과 사인(私印) 등의 발굴하거나 재현해서 인장을 통해 종이나 먹, 붓이 나타나기 이전의 서예사(書藝史)나 문자사(文字史)를 학술적으로 연구하기도 했다. 100여 년 전, 도선사 창건주 청담스님이 사용하던 바가지 인장을 재현하여 인장 재료의 학술적 가치를 높이기도 했다.
그가 명장으로 선정된 것은 지난 2001년도. 인장공예 부문에서는 제1호로 명장이 된 것이다.
“도장이 제일 어렵습니다. 1Cm안에 우주를 끌어들여 생각을 담고 혼을 담아 표현해야하기 때문이지요.” 최 명장의 말이다.
적어도 15년은 해야 비로소 자기만의 글자체가 형성되고, 거꾸로 새겨 찍어봐야 하니까 똑같은 모양이 나오지 않아 10인10색인 것이 인장의 세계라고.
“잘 새겨 보려고 신경 쓰다보면 글자가 제멋대로 춤추듯 하고, 또 부드럽지 않고 각이 져 어색하지만 그 경지를 뛰어넘으면 글자가 소박하고 자연스러워 집니다. 기능에서 벗어나야 진정한 기술자이지요.”
그간의 애환을 묻자 최 명장은 대뜸 ‘인장을 새겨서 무엇을 얻겠다는 계산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과 좋은 작품을 남겨 놓는 다는 일념으로 작업을 하고,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오직 내가 즐거워서 나를 위해서 하는 일’이라고 여기며 마음 편히 살아 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 갈 것이라고 한다. 우문에 대한 현답인 셈이다.
전북 장수에서 부농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6세 때부터 서당에서 천자문을 배우며 살았으나 초등학교 5학년 때 갑작스레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가세가 기울었다. 초등학교 졸업 때 면장이 상을 주면서 학비를 대 줄 테니 중학교 진학을 권했지만, 먹고 잘 데가 없어 포기하고 14세 때 상경(68년), 이발소에 취직했다.
공부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없어 전전긍긍 하던 중, 서예학원 사환으로 일자리를 얻은 후 틈틈이 교실 뒤편에서 한문과 서예공부를 할 수 있었다.
바가지 인장과 문양. |
오직 도장 새겨 아이들 길러 공부시키고 출가시켜 성공시켰지만, 직업에 대한 보람을 느끼지 못하면 삶에 의미가 없다고 여긴 최 명당은 인장공예의 위상높이기에 앞장섰다. 그 일환으로 지금까지 자신이 만든 작품자료를 모아 5권의 인영본으로 엮었다. 각양각색의 서체를 모아놓은 작품집이 완성된 것이다.
중국 번역본을 쓰는 현실에서 우리 이론서를 정립하는 것도 과제 가운데 하나다. 그래서 인장에 쓰는 한국서체의 기본을 일일이 그려 교본을 만들었다.
“기능이 보다 발전한다는 것은 결국 대가를 받지 않는 일에 얼마나 많은 노력을 투자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작업에 열중하다 보면 모든 상상력을 동원하여 자유롭게 도장을 새기게 되고 그 과정에서 희열을 느끼기도 한단다. 자연히 여러 가지 다른 방식을 시도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기술도 발전하게 된다고.
그러나 그 희열 뒤에는 눈물도 있다. 도장 하나를 십 분에 새길 수도 있고 이틀이 지나도 완성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도장에 얼마만큼 정성이 들어가느냐가 문제다.
그는 결코 돈을 위해서 도장을 만들지 않았으며, 한 번도 흥정하듯 값을 깎아준 적이 없다고 한다. 혼신을 기울인 만큼의 대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적어도 2시간은 작업해야 하는 것을 앉은 자리에서 완성해 달라거나, 10원이라도 값을 깎을라치면 만들어 주지 않았다.
한동안은 손님이 없어 아이들 주전부리도 시켜주지도 못했던 시절도 있었다며 어려웠던 때를 회상하며 눈가가 붉어진다. 6년가량을 그렇게 보내다가 차츰 상황이 변해지기 시작했다.
비싸다고 불평하던 사람들이 결국은 단골이 되고 알음알음으로 소개도 했다. 그의 확고한 의지는 성공을 향한 지름길이 되고 작품에 대한 자신도 얻게 되었다.
‘인장업도 명예를 걸고 하는 직업’이라며 신용을 입증하고 재산을 보호하는 도장에 애정과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인장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사인이 일반화되면서 인장을 배우려는 사람이 없다. 짧은 시간에 완성하는 컴퓨터 도장을 아무나 하는 것으로 알아 너도나도 이 일에 뛰어든다. 기계가 만들어 낸 획일화된 인장은 특색이 없다. 주문받은 즉시 만들어 판매되므로 품평할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다. 당연히 질에 대한 경쟁도 있을 수 없다.
사람이 직접 손으로 새기는 인장은 식별이 확실하고, 규격이 다르고 새길 때마다 모양이 다르므로 같은 인장이 있을 수 없다. 사인을 어찌 혼과 정성을 불어넣은 인장에 비하랴.
고래로 군주가 힘으로 할 수 없었던 일을 인장으로 통제할 수 있었다. 인장은 규율을 잡는데 기본 틀이 되었고, 증거를 찾는데도 용이하게 쓰였다. 현대의 기계화된 인장이나 사인은 이런 일에 무용지물이기에 인장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게 최 명장의 지론이다. 사인은 확인하는 기능이지만, 인장은 증표로서의 기능을 갖는다.
여러가지 재질의 인장. |
인장은 글자가 생기기 이전부터 사용되었고 모든 인쇄술의 원류로 자리매김했다. 일찍이 조선시대 영조 이전에는 붓으로 직접 쓰는 수결과 함이 보편화되었다. 정조 시대부터 수결의 위조 율이 많아지자 이를 방지하기 위해 나무에 서명을 새겨 찍었다. 도장의 시초인 셈이다. 그러므로 사인이 상용화된다 해도 도장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최 명장은 600여 가지에 달하는 인장의 종류를 재현하고 이론서를 정립, 사라져가는 전통인장의 맥을 이어나가는 것이 자신의 마지막 과제라고 한다. 이를 통해 인장의 역사를 정리하고 그 회화적 아름다움을 표현해 현대사회 속에 인장의 중요성과 예술적 가치를 심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힘주어 말한다.
또한 인장의 범위를 넓혀, 인장이 여러 가지로 널리 쓰일 수 있도록 영역을 넓히는 일도 자신의 일이라고 말한다. 전통공예와 접목하여 발전시키고, 자수와 한복, 마패, 와당에 있는 전통문양을 인장에, 또 인장의 문양을 자수나 한복, 마패, 와당에 접목시켜 문화관광 상품으로 개발하는 것 또한 자신이 할 일이라고 꼽는다.
금· 은 ·동 ·옥 · 돌 · 나무 · 상아 · 물소 뿔 등 그 어느 것을 막론하고 인장의 재료로 쓸 수 있다. 심지어 도자기로 구워낼 수도 있는 등 인장 재료의 다양성에 착안하여 시대에 맞는 작품창출도 모색하고 있다.
조선왕조어보. |
특히 정부는 얼마간의 연구비를 보조할 것이 아니라 그 분야의 학자와 관계당국 그리고 기능인이 공동으로 연구 · 개발하는 시스템을 구축해서 신소재를 개발하고 전통기법을 응용한 문화상품을 만들어 연구와 함께 생계유지도 가능하도록 뒷받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같은 길을 걷는 후학들에게 그는 이렇게 당부한다. 인장은 사람들이 신표로 쓰는 것이기 때문에, 정성을 다해 자신의 혼을 담아서 만들어야 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도장만 파는 사람, 그걸로 먹고 사는 사람이 진정한 도장장이라고 말한다.
“어떤 일이든 최고가 되기 위해 그 일을 하면 최고가 될 수 없다. 또 기술자(기능인)는 돈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
도장장이는 돈이 네 것인지 내 것인지 잘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말하자면, 10만원 받고 30분 만에 도장을 새기는 것은 도장장이가 아니란다. ‘당당한 대가를 받는 것이 진정한 기술자’이며 정성으로 인장을 새기도록 노력하는 것이 장인정신이라고 이른다.
최 명장은 돈은 못 벌어도 마음 편히 산다고 허허 웃는다. 대신 그는 온 몸으로 봉사한다.
대학과 여러 기관에서 그를 찾으면 마다않고 가서 강의를 하고 기술을 전수한다. 인장동호회에 나가 후학들의 작품을 평가하며 인장의 질 높이기에도 앞장서는 그에게 꿈이 하나 있다. 인장의 역사, 자료를 집대성하여 인장박물관을 건립하는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재물을 모으고 건강도 지켜준다는 소위 복도장을 찾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단다. 최 명장은 이들에게 새기는 사람이 공들여 새기면 복이 절로 깃드는 것이지 값비싼 소재나 그럴듯한 글씨체가 억지로 복을 안기는 게 아니라고 이른다. 보다는 작품을 제대로 평가하는 안목을 먼저 갖추기를 권한다.
최 명장은 그의 3평 남짓한 가게에서 오늘도 고객들의 이름과 개성에 걸맞는 작품을 구상하기 위해 대화를 하며 덕담을 나눈다.
“믿음직한 신표, 동양문양 중 제일 아름다운 것, 그것을 내가 만든다는 일이 얼마나 기쁩니까. 더 잘 만들어서 기관이나 혹은 회사의 상징이 멋있게 드러나도록 하고, 개인의 징표도 더욱 화사하게 보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최 명장은 오직 인장에 대한 열정과 자부심으로 뭉쳐있다.
그가 걷는 길에는 아름다운 발자국이 선명하게 새겨 진다. 그의 혼과 열정이 담겨있는 작지만 값지고 아름다운 발자국이-.
<홍 창신/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