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자료

[시사뉴스]인장공예를 전통예술로 승화시킨다 - 2012.2.29

최병훈 2012. 2. 25. 15:44

인장공예를 전통예술로 승화시킨다

인장공예 명장 1호 ‘최병훈’

민경범기자2012.02.21 07:31:48

“글자나 문양을 새겨서 찍어 사용하는 신물로서의 의미를 가진 것이 인장이다.

또한 개인의 믿음의 증표, 곧 신표이기에 작지만 소중한 가치를 지녀왔다.”

우리나라 인장공예 1호 명장인 여원(如原) 최병훈 명장. 서명 문화가 일상화 되면서 인감제도의 폐지론까지 등장하고 있지만 인장을 작품 세계로 생각하며 외길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여원에게 인장공예는 여전히 우리가 지켜가야 할 소중한 문화유산이며 전통예술의 한 부문이다.

1㎝ 작은 공간에 우주보다도 더 넓은 예술의 경지로 승화시키며 탄생한 하나의 인장작품이 세상을 향한 기지개를 펼쳐가고 있다.

인장의 전통을 계승하고 후세에 알리고자 최근 서울 강북구 수유동에 ‘대한민국명장 최병훈인장연구소’를 연 여원은 전북 장수에서 부농의 아들로 태어나 6세대부터 서당을 다니며 천자문을 배웠지만 부친의 타계로 가세가 기울어지면서 중학교를 포기하고 서울로 상경해 생계유지를 위해 서예학원의 사환으로 일하면서 못 다 이룬 한문과 서예 공부를 시작했고 그후 글씨와 관련된 일을 찾던 중 1968년 인쇄와 도장포를 겸하는 동양문화사라는 인쇄소에서 도장 새기는 일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 어느덧 40여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고무도장과 목도장은 선배들의 어께 너머로 배울 수 있었지만 여원이 원하는 고급 기술의 가르침은 받지 못했다.

하지만 여원은 1976년 전국인장연합회에서 실시한 기술교육과정을 수료하고 이듬해인 1977년 자신의 이름으로 서울 강북구 수유동에 ‘삼양사’를 개업하면서 본격적인 인장공예가로서 길을 걷게 되었다.

여원은 3평 남짓한 가게의 문을 열고 인장업을 시작했지만 자신만의 독특한 글씨체를 연구하기 위해 5년동안 120여개 업소를 돌아다니며 인장분야 장인의 솜씨를 비교 분석하면서 다양한 서체와 기술을 익혔고, 보다 더 체계화된 인장기술 습득을 위해 일본을 비롯 중국, 대만 등 해외를 두루 다니며 인장과 전각에 대한 역사자료와 변천사를 수집하는 인장에 대한 열정을 바쳤다.

그런 와중에도 여원은 기능사보, 기능사 2급, 1급 자격증을 취득, 1999년에는 제2건국위원회로부터 신지식인 인증 받았고 마침내 2001년에는 기능인으로 최고의 명예인 인장공예 명장으로 선정됐다.

 

인장은 1cm안에서 이뤄지는 작지만 큰 예술

명장이라는 칭호를 얻으면서 이전보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지만 여원은 “좋은 인장은 명장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새기는 사람과 고객과의 소중한 만남 그리고 탁월한 선택이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는 것”임을 마음속에 늘 간직하고 있다.

여원은 어떠한 경우라도 급하게 인장을 새기지 않는다. 그래서 인장을 새기기에 앞서 몇 가지 원칙을 가지고 있다. 반듯이 기계가 아닌 수작업만으로 새기고 인장 재료 선택에서부터 글자구성에 이르기 까지 고객과 충분한 대화를 통해 이 세상에 두 개가 아닌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 인장작품을 새긴다는 것이다.

또 인장공예에 앞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고객의 방문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같이 인터넷으로 주문하고 판매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음에도 여원에게는 제대로 된 홈페이지 또는 블로그 하나 가지고 있지 않다.

고객이 가게에 들어서면서 ‘빨리 새겨 달라’는 고객을 가장 싫어 한다는 여원은 비록 1㎝의 작은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예술이지만 이 또한 작지만 아주 큰 집이기 때문에 설계가 필요하고 고객의 마음에 흡족해야 새긴다고 말한다.

여원이 그동안 새겨온 명사들의 인장은 수없이 많다. 현직 국회의원이나 장관들이 단골 고객이기도 하지만 재계 인사로는 지난해 벽조목(벼락 맞은 대추나무)으로 이건희·홍라희 부부의 인장을 한 달동안 제작하기도 했다.

요즘의 인장은 글자도 컴퓨터로 디자인 하고 기계로 깎는 것은 일반화 되었다. 그러나 수작업으로 하는 것만큼 가치는 없다. 물론 재료에 따라서 차이가 있지만 새기는 사람의 창의성과 정성이 담긴 인장만큼 가치는 없기 때문이다.

인장 재료에 있어서 목재를 비롯 옥이나 수정, 상아 등 다양하다. 사람에 따라 서로 다른 취향을 가지고 있지만 자연 그대로의 형태를 살려 손으로 문지르며 새기는 목도장이 정감이 간다는 여원은 목도장의 인장 재료로 회양목 박달나무 돌배나무와 먹감나무 속, 앵두나무나 대나무 뿌리, 대추나무 등을 재료로 하고 있다.

 

후세를 위해 인장에 대한 모든 자료를 기증

국가가 기술 , 기능인에 대해 심사 평가해 선정하는 기능 명장은 해마다 여러분야에서 선정되고 있다. 그러나 선정되고 있는 분야 중 지속 가능 발전하는 분야가 있는 반면 점차 사라져갈 위기에 봉착한 직종도 있다.

후진양성의 어려움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정부의 지원 정책이 미흡한 것도 한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인장공예도 마찬가지다. 그동안 인장공예 명장은 소수를 배출했지만 다른 분야처럼 이렇다할 후진양성의 계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현실이다.

여원 또한 슬하에 여러 자녀를 두고 있지만 후계자는 없다. 그래서인지 요즘 걱정과 근심이 떠나지 않는다. 인장공예 명장이 되기까지 그리고 그동안 쌓아온 인장에 대한 서술적 자료와 역사 그리고 수많은 인장 작품을 후학들에게 어떻게 남길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사실 여원이 ‘대한민국명장 최병훈인장연구소’를 연 뜻도 다른데 있지 않다.

40여년동안 이뤄놓은 조선왕조와 중국 왕조시대의 어보 자료를 비롯, 각종 전각 작품과 상형문자·사군자 ·십이지상·백호 ·돌 ·나무· 옥 등에 새겨 넣은 1000여점의 창작 작품들을 찍은 인영본을 후세에 남기고자 함이다.

또 인장문화가 사인문화로 인해 그늘에 가려질수 있지만 결코 사라지지는 않을 것 이라며 후세 사람들에게 인장문화에 이러한 장인으로 명장이 있었다는 것을 알리고 싶다며 지금까지의 모든 자료를 통해 언젠가 전통을 이어갈 수 있도록 하는 전시관이 마련되어 ‘최병훈’ 이라는 이름 석자만 남겨준다면 대학이나 박물관에 자료를 기증할 의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여원은 자신의 인장연구소에서 인장을 배우고자 하는 문턱을 개방하며 무료로 인장과 서예를 가르치고 있다. 더불어 인장명장 ‘최병훈’이 사력을 다할 때까지 혼인 담긴 작품을 새겨나갈 것이라고 말한다.